20100903
B109는 컸다. 계단식 강의실.
대학 때 계단식 강의실에서 수업듣던 때가 있다. 잉크병을 놓는 홈이 파여있던 책상이 삐그덕 거리고 너른 양 옆으로 난 수직 창문으론 서편 해가 들어오곤 했다. 문과대 건물 계단식 강의실은 적어도 그 정도 인문학적이었다. 그러다 대학교 4학년 때였나. 시간표를 짜다 보니 공대 강의실로 교양 과목을 들으러 가야했다. 기능만 고려한 계단식 강의실의 우악스러움에 첫날부터 질려있었는데 앉아있는 내게 여기가 ......수업 맞냐고 묻는 이가 있어서 '아마' 그런 것 같은데 저도 잘 모르겠다고 얘기했다. 곧 그는 강단으로 가서 서서 수업에 대해 안내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을 끝으로 수강 신청 변경을 했다. 강의실도 싫었고 강사에게 바보같이 대답한 나도 좀 싫었던 것 같다.
예전에 한 두번 들어가본 적 있던 그 강의실에 막상 고독한 일인으로 서야한다는 것이 난감했다. 너무나도 非미적이고 거대해서 우스꽝스런 스크린이 앞면을 꽉 채우고 저 멀리 화이트 보드, ppt 자료를 돌려 볼 노트북은 이편 한켠에, 마이크는 종종 노이즈를 울리고 학생들과의 거리는 너무 멀어서 나는 배우같았다. 아니면 환자? 대학 때 심리학과 사이코드라마 시연에 참여해 본 적 있었는데 그 때 나와 마주하고 있던 역할자에 오늘, 포개어진 느낌.
말이 가끔 끊겼다. 확신에 찬 말투는 싫었고 오늘 소개한 현대미술의 키워드들,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상호성, 몸 등등. 그 무엇에 대해 내가 확신있게 얘기할 수 있을까. 난 약장사도 사기꾼도 아닌데. 프로젝션 불빛에 의존한 어둔 방에 멈춘 말 대신 먼지가 떠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잘 하지도 못했지만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독은 풀리지 않았고 수업이 끝난 후 급속도로 쇠약해짐을 느꼈다. 273번 버스는 고대앞을 지나 대학로를 거쳐 원남동을, 종로를 거슬러 교보문고 근처까지 나를 실어왔고 새로 오픈한 교보문고의 밝은 조명은 욱신거리는 등과 함께 나를 더더욱 피로하게 만들었다. 되돌아온 집에선 거실에서, 침대에서 한두 시간씩 아무데나 벗어놓은 옷처럼 잠들었다.
지금, 적막한 시간, 한강의 발그레한 산문집을 오랜만에 꺼내 읽는다.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바타이유의 에로티즘 책의 색과 유사한, 보다 단출한 책을 한 시간 가량 읽고선 하루의 조증이 내린다. 다시 자야 하는데. 또 아침엔 왠지 어딘가로 해장국을 먹으러 가면 좋겠단 생각을 하고 있다.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고 해도 뜨겁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