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미술 2020년 2월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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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희, 말없는 눈, 리뷰

 

산골 유원지에서 지적 장애가 있는 십대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인터뷰를 보며 자식을 잃은 부모라면 저렇게 침착하게 인터뷰를 할 순 없다고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아이는 실종 열흘째 되는 날 유원지에서 발견되었다. 갖추어야 될 자질이나 덕목, 경향성을 증폭시키다보면 도리어 함몰에 이르는 때가 있다. 전은희의 전시를 보며 한지에 채색이라는데 그 발색의 물성이 짐짓 남다르다 여기며 전시를 둘러보다 마침 마주친 안면 있던 작가와 평소 보아오던 동양화와 다르지 않느냐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한편 참혹이 재현될 수 있는가, 참사는 이미지로 어떻게 발화되는가의 문제를 두고 참사 이후는 ()풍경만이, 즉 풍경이어서는 결코 안될, 재현이어서는 안될 이미지만의 가능성에 무게를 싣게 되기도 한다. 참사와 재난은 비상한, 비상사태라서 덧말은 말 그대로 이후에 따라붙고 준칙(Maxime)을 구성하여 실천에 제재를 가한다. 예술 제도에서 순환되는 제재는 검열 기제가 되어 붓질에 앞서, 셔터를 누르는 직전에, 편집 배치의 순간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구상의 차원에서도, 나아가 생활의 순간순간에 개입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토록 준칙은 준엄한데, 인간에게 자질이나 덕목은 인간다움이라는 최소한의 요청을 일군다하여도, 또 모던(Modern) 아트에서 이미 예술의 예술다움에 대한 최소공약을 선언했다고 한들, 참사나 재난 (이후) 미술에 준칙은 정말 가능할까. 실상 참사나 재난에서 덕(virtue)을 운운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독히 인간사의 일인지, 여기에는 덕의 상실만이 진실일텐데, 인간사의 일이라 덕이 무람없이 소환되고 마는 건가. 그렇다면 미술은, 그림은 무엇을 왜 그려야만 하는가. 무엇을, 왜 그리고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을 전은희의 말없는 눈은 왜 보되, 말없기를 자임하는가로 압축해 본다. 전은희의 말없는 눈에는 공습의 검은 연기를 먼발치에서 보는 관람자들#13이 있고, 허물어져가는 터를 서성이는 가족이 있다. 갓 조성된 듯 세월의 다독임 없는 죽음이 도저한 묘역에 주저앉은 이가 있다. 휴식이라 차마 붙이기 힘들 생의 휴지(休止) 상태가 그을린 이의 몸에 기거하고 재 묻은 발바닥이 생존의 증거라서 잠시 안도하게 되는 underground가 있다. 모든 그림이 재현이라면 재현이겠다. 나의 서술은 있다로 귀결되고 있다. 따라서 전시의 관람객에게도 우선 있는것을 보게 만든다. 그러나 재현으로 도드라지는 것보다 그리기의 과정에서 오히려 화염과 연기에 휩쓸려 잡히지 않는 인물과 사건이 그림으로 발생하였다. 전은희는 말없는 눈으로 참사를 고발하는가. 희생을 숭엄하는가. 우리 모두를 피해자다움으로 소환하는가. 악의 축의 급부에 관객을 소환하는가 생각해보면 관람은 협소하고 운신은 미미할 따름이다. 예술도, 작가도, 관람객도 보여주기와 보기의 순간에 덕의 발효를 점화시키지 못한다. 그럼에도 하릴없는 붓질이 전은희에게서, 또 다른 이들로부터 도래한다. 큐레이터이자 미학자 보리스 그로이스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에서 각각 행한 테러의 미학이란 강연에서 언제쯤 우리에게 고야나 피카소와 같은 이들이 등장할까를 묻는 각국 청중의 질문에 대해 만들어지고 있는 모든 낮 모든 밤의 이미지가 이미 고야, 피카소의 그것들이라고 대답했다. 참사, 재난, 테러 시대의 이미지는 재가공이 없이도 혹은 재가공 없이 고스란히 타전되고 있다. 모든 낮, 모든 밤의 이미지가 속보라는 예외 상태로 상례화되는 21세기에 이 이미지의 유통은 죄의식을 한 겹 벗기는 자위로, 정의의 명목으로 손쉽다. 할 수 있는 일이 부박하여 오늘을 산다. 그러나 말은 덕을 수반하지만 눈은 말 이전에 우선 목격한다. 증언의 준비다. 시각성이 아무리 구성의 산물이라고 하더라도 말하기 전에 본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대관람차(大觀覽車)에 싣고 관람의 수준과 예절을 강제해도 관람해야만 다음이 있다. 참사 이후, 재난 이후와 같이 가역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몸 둘 바 없는 구겨짐이 응당 예비되어 있을 때 예술은, 그림은 구겨짐에 나란하여 이를 그린다. 도리 없음에서 오는 여러 수순인데 그리고 이제 덕이 뒤따른다. 바로 이 찰나의 시점에 예술가가 살면서 비판을 밥처럼 먹으며 옷처럼 입는다.

Posted by diewinterreis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