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성우씨 생생화화 전시를 위한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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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우가 2017ongraund에서의 개인전 <땅 위의 밤>의 모티프가 된 새에 대해 말하기 시작할 때 머리에는 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올랐다. 그는 로드킬 당한 새로부터 출발했지만 내 새는 상공에서 비상하지 못하고 어느 공간에서 비정형적으로 푸드득거렸다. 이 새를 안아 올린 이는 조르주, 아내 안느를 사랑하는 평범한 노년의 사내이다. 미하일 하네케의 <아무르>는 조르주와 안느의 사랑을 세간의 이목으로는 파국으로 담은 영화다. 주방으로 날아들어 온 새를 품은 조르주를 연기한 배우는 장 루이 트리디낭. 그는 젊은 시절 프랑스 도빌의 바닷가에서 아눅크 애매와 <남과 여>를 찍었다. 영화 속 담배 피는 이들의 손가락이 유독 외로워보였고 트리디낭이 애매의 의자 뒤로 손을 올렸을 때 손과 등이 닿는 장면에는 간질간질함이 드러났다. 늘 영화에서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트리디낭은 좋겠다고 생각했다. 새를 안아서 품던 노인까지 이어지던 생각은 다시, 두터워졌다고 하기에는 내 표현이 부족하고 흩어졌다고 하기에는 온전히 말하지 못한 것만 같은 <땅 위의 밤>으로 돌아왔다.

 

한성우의 전작으로는 목공실 작업이 대표적이다. 징글징글하게 그려낸 목공실인데, 그는 <땅 위의 밤>에서부터 구체적 장소에서 그 뒤편으로 점차 이행하고 있다. 뒤편이라 할 때 이 뒤는 물리적 장소 아닌, 다른 장소이다. 그가 이행을 얘기할 때 다시 한편 목공실을 떠올려보면 그는 목공실을 그렸던가, 즉 구체적 장소를 그렸던가 곱씹어보게 되는데, 그때도 그는 장소를 그린 것이 아니지 않을까 의심이 점차 커져갔다. 그는 보는 이에게 목공실이라고 얼른 떼어주고, 그 명사의 테두리에서 우리가 생각을 이어갈 때 그 틈을 이용해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해보게 된다. 자유는 나만의 즐거움, 쾌락이라기보다 시간을 버는 그런 태도로 간주될 수 있는데, 적금처럼 벌어들인 시간이 축적되어 작년부터 올해가 있지 않았나 싶다. 이제 단단한 형이 프레임 안에 드러나지 않는데, 캔버스 프레임으로 잘라내 지지 않을, 형을 부정의 방식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 ‘무엇 아니라는 자문에 대해, 순서가 있지 않은, 계획이 있지 않은, 완성이 있지 않은, 이와 같은 질문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바로 이 방식이 그가 얘기하는 형용사적 태도에 절묘하게 안착된다.

 

그는 명사적 태도가 아닌, 형용사적 태도로 이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명사는 이름이나 개념을 나타내는데, 그렇기 때문에 명사는 매듭이고 정리다. 반해서 형용사는 사람이나 사물의 성질이나 상태, 존재의 어떠함을 나타내는데, 성질, 상태, 어떠함은 따라붙는 무엇에 대한 턱, 계단참, 이행을 의미하고, 이제 그가 짚는 형용사적 태도에서 어떤 리듬을 감지한다. 바로 이 리듬을 포착한 지난 봄 5월 처음 한성우의 작업실에 가서 작업을 보고 대화를 나눌 때에는 리듬의 정체에 대해서는 좀처럼 파악하기 어려웠다. 터널에 대해 얘기하면서 서로 적절한 문장이 만들어지지는 않고 아, 하 감탄사와 낮은 탄식이 오고가기만 했다. 다만 이 깜깜함이 관은 아니기를 격려하며 자리를 마쳤는데, 9월 그리고 완성된 작품 앞에서 그가 무사히 통로를 더듬으며 나왔구나, 감내해 왔구나 싶어서, 조력자로서의 무력함을 느끼면서도 다행이다 안도한다.

 

나는 한성우 작업에서 소리를 듣는다. 전시장은 두텁게 누르는 공기가 있어 난청이나 환청의 상황에서 귓전을 자극하는 고주파의 찡한 소리에 조명이 거든다. 작업실에서 민낯의 작업을 마주했을 때 그 소리는 좀 더 둔탁하고 불규칙하게 다가왔다. 뭉개고 비빈 후 내동댕이처진 수건, 그건 몹시 걸레에 가까운데 퍽 넓어 보이는 작업실은 이미 걸레산이 여기저기였다. 생각보다 많은 작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해보았는데 이 작업실이 가히 최상급에 가까웠다. 어떤 작가는 잠시 뜨끔할지 모르겠지만, 이 말은 사실에 가깝다. 12개의 캔버스가 324.4 × 781.8 cm 위아래로 2열을 이루고 있는 <untitled(work no. 21>을 보아 이미 짐작했겠지만 온 봄, 온 여름은 이 작업들에 콸콸 쏟아져 내렸다. 큰 길에서 벗어난 그의 작업실은 생각보다 적요한데 음악을 틀어놓고 이루어지는 작업에서 음악보다 더 뭉텅이의 소리는 한성우의 작업에서 나온다. 그림에서 무슨 소리라니 터무니없다 할지라도 설득하고 싶다. 끼그덕, 기기, 끄극, 기괴, 괴기...... 한성우의 전작에 대한 김영민 작가의 서문에서 그래서 그림이 귀신같은 것일까라는 구절을 읽었을 때 웃음이 터졌다. 퇴마에는 능력도 관심도 없지만 바로 이 귀신같은 그림과 그림의 소리에 대해 얘기해야겠다.

 

어느 작가를 위한 글에서 나는 이제 그가 그리는 그 무엇에 대해 궁금하지 않다고 썼다. 이 문장은 분명 그를 위한 특수함이 있었으나 내가 그림을 바라보는 태도이기도 하다. 대상을 통해 의미를 풀어내기란 얼마나 쉬운가. 대상에 대한 해설의 묶음이 과연 그림에 대한 글일까. 표피의 촉각으로 도출되는 일차 해석은 어린 아이도 하고 노년의 관객도 한다. 익숙해서 낯선 풍경이란 말은 너무 간단해서 아무 것도 담지 못한다. 도대체 작가는 아이도 단박에 알아채는 그 세계를 위해 만력을 기울이는 걸까.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응수하고 싶다. 이미 널린 시각장의 파편을 그러모은 게 그림이라면 그림보다 매혹의 대상은 세계에 도처하다. 그림이 도처하는 것들을 망각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친절함을 발휘한다고 눙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림은 친절할 수 없다. 과녁을 향해 쏘는 단 하나의 활이 아니다. 따라서 시각의 마술로의 그림을 보고 읽는 이들에게 그림의 다른 무엇으로 주의의 환기가 필요하다.

 

한성우는 이미지의 서사를 다루면서, 의미없음으로 귀결될 때 남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반문한다. 그는 실패를 전제하고 작업한다.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상상의 장소에 대해 그리며 살과 뼈에 밑줄을 친다. 그가 남긴 메모들이 확신에 차 있었다면 나는 그와 글들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결국 남긴 그림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폭력과 폐허에 천착하는데 이는 외부로부터 가해진 폭력이나 폐허가 아니다. 철저히 자기파괴적인 행위의 목록을 매일 매일 수행하는데 이 목록은 늘 얼룩지고 지워져서 무엇이었는지, 왜 하는지도 잘 모르게 되어버린 더러운 백지라는 역설로만 있을 뿐인데 그저 귀신에 씌운 이처럼 거듭될 뿐이다. 그는 주검을 떠올리는데 자신이 주검인지, 그림이 주검인지 애매모호하다. 아무런 논리적 연관 관계없는 주검을 아들이라 명명하고 죽은 아들을 살리려는 라즐로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의 아버지 아닌 아버지 사울처럼 그러고 있다. ‘그러고 있음의 불명료함이 몸집을 불려 여기까지 왔다. 죽은 이는 무게가 온전히 실려서 무겁다. 작업실에 던져진 수건이 흡사 염의 흔적처럼 다가왔다. 과장일지 모르겠다. 이입의 과정은 그렇다.

 

대낮과 한 밤 그리는 만큼 닦아내었을 무제 작업들 앞에서 무거워졌다. 그리고 이제 한성우에게 다시 이 과정이 필요하지는 않을 듯하다. 다시 조르주의 새로 돌아와서 아내 안느는 죽었지만 그는 새를 흰 천으로 품었다. 사랑이 값싸고 흔하지만 때로는 우발적으로 보이면서 납득하기 어려운 선택을 감내케 하기도 한다. 로드킬당한 새로부터 출발한 작년 올해의 시간들에서 그는 그 새를 한 길에 두지 못했었나 보다. 그래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리고 닦았다. 끼그덕 거리는 소리는 살아있는 새가 움직이는 소리이기도 하고 죽은 새를 염하는 소리일 수도 있다. 어떤 소리이든 한성우는 무목적적 최선을 다했다. 그림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식들로 성과 예를 다했다. 그러니 이제 다시 낮이고 부디 홀가분해지기를 바라며 홀가분해지더라도 마음이 죄스럽지 않기만을 바란다. 한 해가 지났고 한 살을 얻었을 뿐이니까.

 

 

 

Posted by diewinterreis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