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에서 나스카로 가던 버스 안이었나. 살아가면서 가장 괴기스럽고 공포스러웠던. 혹은 실소를 금치 못하거나 어처구니없던 그런 밤을 보내고 H는 리마에서 북쪽으로, 나는 리마에서 남쪽으로 향했다. 둘 중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메스꺼운 밤은 선량할지도 모를 사람들을 인사도 내팽긴 채 갈길을 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붉은 혀를 놀리던 악마는 세상 어디서부터 온 말인지도 모를 독을 내뿜고는 그래도 모자랐는지 더러운 몸으로 그 밤을 제압하려 했다. 살면서 그 누구의 입에서든 그토록 진심으로 그토록 자신에 차서 "너 빨갱이이지?"라는 말을 검게 토해내는 걸 처음 보았다. 이런 세상에서 살 바엔 난 빨갱이가 되겠다는 둥 그런 치기어린 말들을 부러 해왔다는 과거가 수치스러울 만큼 네가 빨갱이라는 것과 그런 너의 존재를 벗겨버리고 말겠다는 악마의 존재는 말도 안됨 혹은 어처구니가 없음 등 그간 살면서 어이가 없다고 여겨왔던 상황마다 내뱉었던 그런 말들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또는 그렇게 가벼운 말만 뱉고 살아온 내 삶은 얼마나 안온했는지, 이런 생각도 결국 사후적 생각들이지만, 적어도 그 순간에는 내 삶에 새롭고 더러운 국면이 정말 등돌리면 돌발할 수 있다는 것을 온 머리로, 온 몸으로 맞았다.
시간이 흐르고 난 후, 여전히 놀리던 그 혀를, 이죽거리던 그 존재를 밟지 못했다는데 분노를 느끼지만 리마에서 멀어지는 거리만큼, 그리고 그 악마가 한국에서 멀어져간 거리만큼 현실성이라는 것이 재편된다는 것을 알 것 같다. 그리고 나선 이민 세대들의 멘탈리티-의식구조라는 말 보다는 그들의 멘탈리티를 들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 검은 베일.